편집자와의 통화에서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적잖이 놀랐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책이라서 번역 작업용 책을 줄 수 없다는 거지? 투명 스프링으로 제본된 작업용 책을 받자마자 나는 우선 목차 옆 카피라이트 페이지를 찾아 들여다봤다.
원래 1963년(!)에 『르네상스 건축(The architecture of the Renaissance)』이란 제목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1969년에 템스앤허드슨에서 현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The architecture of the Italian Renaissance)』으로 확대개정판을 펴냈고 1986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왔으며 이 세 번째 판을 2006년에 다시 찍었다. 카피라이트 페이지에는 이 고색창연한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요약하자면 1963년의 『르네상스 건축』을 기준으로 세 번째 판, 1969년의 템스앤허드슨 판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으로는 두 번째 판의 (20년 만의) 중쇄가 번역의 저본(底本)이라는 이야기다. 그 중쇄가 나온 지도 10년이 넘었으니, 그 세월을 건너 이 책을 번역하겠다는 머나 먼 한국의 출판사에 보내 줄 책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신기할 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출판사라면 늘 자사에서 펴낸 책들을 수납할 공간 부족에 시달릴 테니 말이다.
이런 제본된 책으로 작업해야 하는 불편 외에도 번역자 입장에서 옛날 책은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과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은 쉼표와 관계대명사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문의 행진으로 점철된 책이다. 좋게 보자면 이런 긴 문장은 자고 일어나면 신문물이 등장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보다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의 속도가 느긋했던, ‘좋았던’ 시대 분위기의 소산일 수도 있겠다(이 책의 저자 머레이 교수가 칠판 앞 탁자에 한쪽 팔로 놓고 비스듬히 서서 학생들에게 각종 단서와 조항을 붙여가며 강의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유장한 장문의 문체를 살리는 것보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인 교과서적 비문학이므로, 문장을 의미 단위로 끊고 앞뒤 문장을 고려해서 뜻이 통하도록 재배치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결국 시간당 작업량이 현저하게 떨어져 작업 기간이 훨씬 길어졌다.
그렇다고 ‘옛날 책’이 늘 시간 잡아먹는 골칫덩어리는 아니다. 앞에서 말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카피라이트 페이지는 연도 표시에서 ‘/’와 ‘-’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머레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1425/30은 1425년과 1430년 사이의 어떤 시점, 1425-30은, 1425년에 시작해 1430년에 마쳤다”는 뜻이라고. 흔히 우리 책에서는 1425~30년으로 표기되겠지만 영어책에서는 ‘/’와 ‘-’를 구분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대학원 때부터 궁금해하다가 심지어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해묵은 수수께끼가 풀렸던 셈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덕분에 나는 지긋지긋한 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랜선 이탈리아 여행을 실컷 했다. 피렌체,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처럼 다녀왔던 도시는 물론 만토바, 비첸차 같은 미답의 도시들까지, 인터넷으로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고 구글 지도에 ‘가야 할 곳’으로 깃발을 꽂으며 지난 여행의 추억을 곱씹고 (상상의) 여행 루트를 계획했다. 이 옛날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구나 싶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도 지면에 미처 담지 못한 구구절절한 사연 끝에 세상에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실은 번역서 표지는 원서 표지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가슴 설레게 한다. 내게는 결코 작업하기가 녹록치 않은 ‘옛날 책’이었지만, 르네상스 건축 분야에서 오래 살아남아 ‘시간으로 증명된(time-tested)’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