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공기마저 달콤하게 물들일 것 같은 핑크빛 ‘멘들스 박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이 상자를 만든 사람은 영화 그래픽 디자이너 애니 앳킨스입니다. 절절한 고백을 담은 러브레터, 긴박한 소식을 알리는 전보, 스릴 넘치는 전개를 예고하는 탈옥 지도부터 초대장, 편지, 티켓, 신문, 책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그래픽 소품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일이지요. 앳킨스는 얼마 전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책도 한 권 펴냈습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170여 점의 소품을 모은 『애니 앳킨스 컬렉션』입니다.
웨스 앤더슨, 스티븐 스필버그, 토드 헤인즈 등 이름만으로 존재감이 느껴지는 영화감독들과 작업해 온 앳킨스는 그래픽 소품을 만드는 과정, 현장에서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아찔한 실수담을 책 속에 풀어놓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개들의 섬》, 《스파이 브릿지》, 《원더스트럭》, 《튜더스》 등 다양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크고 작은 소품들이 페이지 곳곳에 자리합니다. 앳킨스가 안내하는 소품 디자인의 세계는 모험처럼 흥미진진합니다. 관객이 소품과 세트를 진짜처럼 느끼게 만들도록, 치밀한 조사는 기본입니다. 오래된 소설책 안에서 발견한 영화표, 벼룩시장의 중고 서적 상자에서 찾아낸 1920년대 한 독일 소녀의 일기장 등은 인터넷 검색만으로 얻을 수 없는 현실감을 소품에 불어넣습니다. 앳킨스는 때로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도 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촬영을 위해 독일 괴를리츠에서 겨울을 보내며 가상의 나라 ‘주브로브카’를 만들 때 느낀 생동감과 비현실감을 생생히 전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소품 디자이너로서 지루함을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종이 소품이 촬영 중 손상될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복제품을 만드는 시간과 노력이 그렇습니다. 똑같은 영화표를 마흔아홉 장, 똑같은 편지 봉투를 열네 개씩 만들면서 각각의 눌린 자국이나 얼룩이 동일하도록 디테일에 집중하는 모습은 치밀함을 넘어 치열하기까지 합니다. ‘모든 그래픽 디자이너는 작은 것들을 보살핌으로써 훨씬 더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진심으로 노력한다’는 앳킨스의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열정을 듬뿍 담아 만든 소품들은 대부분 촬영 후 폐기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앳킨스도 멘들스 박스를 단 두어 개 소장하고 있다지요. 그렇게 안타깝게 사라지는 숙명을 가진 소품들은 이 책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팝업 북처럼 소품들이 ‘짠’ 하고 나타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중요한 역할을 맡은 ‘히어로 소품’뿐 아니라, 잠시 스쳐 지나간 소품까지 『애니 앳킨스 컬렉션』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 소품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앳킨스의 유쾌한 입담 덕분인지 여섯 개의 챕터가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갑니다. 표지 위 성냥갑과 연필밥이 주는 깔끄러운 촉감까지 느끼고 나니, 앳킨스의 마법 세계에 들어가 함께 소품을 만들고 나온 기분입니다. 그런데 잠깐, 이 책의 표지는 상아색 모눈종이네요. 앳킨스는 꼭 이렇게 생긴 종이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표지판을 스케치했습니다! 두툼하게 접힌 표지를 펴 보니 숨은 공간이 나타납니다. 앳킨스가 우릴 위해 남겨둔 모양인데, 여기에 무엇을 그려볼까요? 그대 그리고 나의 손끝에서도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길 바랍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끄트머리, 로비 보이로 일을 시작해 호텔 주인이 된 제로는 지배인이었던 구스타브를 회상하며 말합니다. “그는 놀랍도록 우아하게 환상을 지켜냈다”라고요. 앳킨스의 소품들도, 그리고 이 책 『애니 앳킨스 컬렉션』도 같은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환상과 현실 사이 어디쯤을 기분 좋게 날아다녔거든요.
사라진 환상이 아쉬울 때,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코페의 시어(詩語)가 떠오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때의 환상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 애니 앳킨스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이어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다시 한번 앤더슨 감독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녀가 보여 줄, 아직 끝나지 않은 환상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바꾸는 ‘히어로 소품’처럼, 책은 누군가의 삶을 바꾸거나 영감을 주기도 하지요. 『애니 앳킨스 컬렉션』이 영화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는 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히어로 소품’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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