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화상을 딱 한 번,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술
학원에서 그렸다. 한창 예민하던 시기,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나는 실제보다 더 예쁜 나를 그리고 싶었지만, 외모 콤플렉스가 발동해 괜히 남자애들한테 놀림이나 살까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자화상을 남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거울 보는
것도 싫어 길을 가다 나 자신을 만나도 못 알아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내 얼굴을 잘 모른다. 물론
셀카도 잘 찍지 않는다. 거울이 없어서 자기 얼굴을 볼 일이 없던 때에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자화상은 존재했다.
이 책 『얼굴은 예술이 된다』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이 책은 부제대로 자화상의 문화사를 다룬 책이다. 자화상의 문화가
발아한 중세부터 화려하게 부활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이 어떻게 시대를 반영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사회의 정체성과 개인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자율적인 장르"로 발돋움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꼼꼼하고
찬찬히 설명한다.
자화상을 회화로 표현된 증명사진쯤으로 기대했던 내 무지를 깨고 아주 다양한
이유로, 또 다양한 형태로 그림과 조각에 녹아 들어간 예술가의 자화상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관심이 간 것은 예술가가 군중 속 한 인물로 등장하는 ‘행인
자화상’이었다. 이들은 중세 초기 채식가들이 양피지에 그린
삽화의 배경 인물로 그려지기 시작해 ‘개미처럼 소형화’되어
표현되거나, 타인의 초상화에서 배경의 거울 속에 보일 듯 말 듯 존재한다. 특히 ‘대리인 자화상’은
내가 아닌 인물을 나를 닮게 그리거나 자신을 그림 속 등장인물의 하나로 ‘위장’해 자화상인지 아닌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자화상의 형태다. 15세기까지
그저 조심스럽고 겸손하게만 그려지던 자화상은 16세기 들어 예술가 자신이 전면에 나서 영웅이나 신동, 미소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반대로 ‘가짜 영웅’이 되어 우스꽝스럽고 추악하게 그려졌다. 또 세상에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후대에 와서 편의상 자신의 얼굴을 도구로 삼은 예술가의 습작으로 의심받는 일도 있다. 18세기에는
은퇴 후에 매일 자화상 드로잉으로 일상을 기록한 ‘자취를 더듬는’ 자화상도
있고, 비슷한 맥락에서 한 점의 그림에 자신의 평생을 대표하는 16명의
자기를 그린 자화상도 있다. 죽음의 고비를 넘게 해준 의사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가 자신을 치료하는 장면을
그려 선물한 예술가가 있고, 근대에 들어서는 바바리맨 같은 복장으로 수음을 하는 모습까지 그린 예술가도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자화상은 얼굴에서 몸 전체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더 다양한 형태를 띠고 기법과
매체 또한 기존의 회화의 형식에서 벗어났다. 결국 "모든
화가는 자신을 그린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모든 작품이 자기 발현일 테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한 자화상이야말로 예술혼이 가장 자유롭게 발현된 작품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른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과학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나는 몇 년째 책이 곧 계절인 생활을 하면서 원저자의 생각을, 그 사람의 숨은 의도를, 그리고 그 사람의 성격과 문체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되도록 나를 버리고 그 사람이 되려고 했다. 아직 한창 이 일이 재밌을 때라 아주 작은
불만도 없지만, 그냥 문득 나를 너무 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록 자화상에 대한 내 개인적 경험은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예술가의 자기 초상에 관한 책에 눈이 갔고 덕분에 화폭에 담긴 다채로운 자기 표현에 실컷
대리만족했다. 그림 속 예술가의 눈이 나를 꿰뚫는 것 같아 시선을 피한 적도, 페이지를 서둘러 넘겼다가 다시 살짝 들춰본 적도 여러 번이다. 게다가
저자가 예술가의 자화상을 예술가 본인보다 더 섬세하게 분석해 준 덕분에 나 혼자 그림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었을 의미와 속내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다.
2013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18~24세가
찍은 사진의 30%가 셀카이고, 2018년 조사에서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찍는 사진이 미국의 경우 81.3%가, 한국은 66.3%가 셀카라는 결과가 나왔다. 예술가의 문화였던 자화상이 일반
대중의 문화로 확산하였고 이 현상은 몇십 년 뒤 자화상의 문화사에 다음 챕터가 될지도 모른다. 현대판
자화상인 셀카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배경, 어떤 구도로든 맘에 안 들면 수백 장씩 찍고 앱을 이용해 보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촬영에서 업로드까지 몇 분이면 완성되는 자화상 속 당신의
얼굴이 예술이 되길 바란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나도 모처럼 셀카 한번 찍어봐야겠다.
-조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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