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겨우내 바짝 몸을 수그렸던 자연은 부지런히 바깥세상을 향해 촉수를 뻗어 나가는데 옹송그리고 있는 이는 나뿐인 것 같다.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지 어언 일 년이 훌쩍 넘어가면서 지금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봄바람의 유혹을 핑계로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답답한 고립 상태를 잠시나마 잊어보고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을 찾았다.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시공간을 훌쩍 건너 1930-1940년대 경성에 살았던 문인과 미술인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히 들려준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식민지 도시 경성에서 이 예술가들은 부조리하고 꽉 막힌 현실에 짓눌린 가운데 도시화와 근대화가 가져온 새로운 문화에 충격과 동시에 매력을 느꼈다. 이들은 새로운 도시 문화와 서양의 전위적 예술에 매료되었고 새로운 감수성과 미감으로 신선하고 실험적인 예술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발 딛고 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예술계와 대중은 이들의 ‘낯선’ 예술을 외면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의 인정을 구하는 대신 함께 새로운 예술을 꿈꾸며 서로를 향해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문학과 미술이라는 경계를 넘어 글과 그림으로 함께 엮어 나간 유대감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만의 해방구를 용케 만들어 나갔다. 모순적이고 제약 많은 현실에서 자리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이란 어쩌면 꿈꾸는 자유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들이 함께 꾼 꿈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은 이들이 남긴 작품이 이를 생생히 증언한다. 전시장 바깥으로 나간다. 여전히 번잡하고 소란스럽고 시시하고 진부하고 정체된 그곳으로. 살포시 내려앉는 벚꽃 잎을 맞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꿈을 꾸자고 되뇌어 본다.
“한국 근대기 문학인과 미술인들이 함께 만들어 낸 소중한 자산들을 발굴하고 소개한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록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 찼던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귀족적'이었던 예술가들의 멋진 신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소개글 중에서)
다가오는 책들
5월에 만날 책
<신화와 클래식>
영원한 이야기의 원천 그리스-로마 신화가 클래식 음악과 얼마나 근사한 앙상블을 만들어 내는지를 흥미로운 이야기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낸 책. 평소 다가가기 어려웠던 클래식이었다 해도 이 책을 통해 친숙하게 조우할 수 있다. <신화와 클래식>은 신화라는 친숙한 이야기로 음악 세계 곳곳을 들여다봄으로써 클래식이 우리 삶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6월에 만날 책
<식물의 세계>(가제)
전 세계 다양한 지역의 식물 80종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식물들이라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식물들이 많다. 수려한 일러스트로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프랑스의 겨우살이, 덴마크의 클로버, 네덜란드의 튤립, 독일의 홉, 에스토니아의 민들레, 스페인의 토마토 등 익숙한 식물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편집자가 소개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복원한 한국 근대미술 60년
주은정 번역자님께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소개하신 글을 읽다 보니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한국의 근대미술을 한 권으로 정리한 『한국 근대미술사』다. 그동안 우리의 ‘근대’는 주목받지 못한 역사였지만, 최근 들어 근대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영화, 드라마, 패션, 디자인까지 근대에서 영향을 받은 콘텐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20-30대들에게는 ‘뉴트로’ 트렌드의 발원지인 셈이다. 한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시대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근대적 국민국가와 산업자본주의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표상과 시각체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개화기에서부터 전통미술과 신미술 모두 식민지 문화로 재편된 일제 강점기, 그리고 좌익과 우익 이데올로기에 의해 각기 다른 길로 미술의 현대화를 진행시킨 해방 시기까지 근대 미술의 모든 것이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물론,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전시인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와 함께 이 책을 선택한다면 몇 배는 더 즐거운 전시 관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_ninon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맥스 달튼. 그가 그려 낸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웨스 앤더슨. 실제로 맥스 달튼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오리지널 일러스트를 그렸다. 또한 동명의 아트북과 몇 권의 웨스 앤더슨 도서의 표지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빈티지하면서도 따스한 색감과 유머러스한 인물들은 작가만의 개성이자 커다란 장점이다. 웨스 앤더슨 외에도 여러 영화의 포스터와 특정 씬을 재현하여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이번 전시에서 《기생충》 포스터가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감독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전시지만 팬이 아니더라도 이보다 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