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작업실을 홍대에서 방이동으로 옮길 때 견적을 내러 온 포장이사 아저씨가 하신 말. “가구는 별로 없는데 저 LP들 때문에 트럭을 한 대 더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저게 보기보다 엄청 무겁거든요.”
뭐? 이사 비용이 두 배가 된다고? 순간, 이제 듣지도 않아 한쪽 벽 가득 먼지만 쌓인 3천 장쯤 되는 나의 LP들을 싹 다 처분해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사를 마치고 LP를 다시 꽂으며 평생 애지중지 꺼내 듣던 얘네들을 버릴 생각을 잠시라도 했다는 나 자신이 몹시 비루하고 간사하게 느껴졌다. LP는 내 청춘의 찬가Anthem였다.
레코드판 한 장 한 장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새로 산 LP의 포장을 뜯고 A면 첫 곡에 바늘을 올리는 기분은 배낭을 메고 기차나 비행기에 올라타는 설렘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부터 한 장 두 장 모은 LP가 어느덧 벽장 하나를 가득 메우게 되었는데, 1999년 친구들과 함께 대학로에 LP바를 차렸을 때 바야흐로 나의 LP들은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영업이나 수익과는 별로 상관없이) 밤새도록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지내고 보니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때가 마지막이었던가.
어렵사리 앰프와 턴테이블 연결을 해놓긴 했지만 LP를 찾아 꺼내어 음악을 듣는 일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21세기 어느 시점부터 아예 LP를 듣는 일이 그만 없어져 버렸다.
살면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별한 것들, 예컨대 카세트테이프, VHS 테이프, 전화카드, 필름 카메라, PC 통신, 삐삐, 싸이월드 등 우리 세대 ‘추억의 창고’에 LP도 진작에 합류한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내 3천 장의 애물단지 LP는 알파벳/가나다 분류도 안 된 채 내 작업실 녹음 부스 한 편을 가득 메워 흡음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작은 반전이 일어났다.
얼마 전 옛 제자가 놀러와 최근에 턴테이블을 샀는데 들을 LP가 없다며 판을 몇 장만 빌려달라는 것이다. 이 친구와 함께 벽에 꽂힌 LP들을 한 장씩 뽑아 펼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내 손때가 묻은 바로 그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세계’가 고스란히 그대로 거기에 남아 있었던 것. 나는 세파를 타고 변했지만 얘네들은 한 치도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열댓 장의 추천 LP를 빌려 들고 즐거워하는 제자를 보며 조만간 꼭 LP들을 알파벳/가나다순으로 정리해 다시 꽂고 턴테이블과 앰프도 점검하리라 오래된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본다.
나는 아직 LP와의 이별을 마치지 못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