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Pick #그림책 최경화(<스페인 미술관 산책> 저자)
서점은 언제나 나의 놀이터였다. 그러나 외국 생활 이후, 펼쳐진 밥상은 한가득인데 도구가 부족해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없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공간이 되었다. 제목, 저자 소개와 뒷표지의 책 추천 글들을 읽고 호기롭게 책을 펼치지만 목차와 첫 페이지를 읽고 나면 집중력이 흩어지고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정보를 얻기 위한 생존용 읽기가 아니라 즐거움을 얻기 위한 독서는 내 외국어 실력으론 무리였다. 그러다 마드리드의 그림책 전문 서점에서 이수지 작가의 스페인어판 『파도야 놀자』를 만났다. 책방 한쪽 의자에 앉아 흰색과 푸른색에 푹 빠졌다. 텍스트 없이도 한참을 책과 놀 수 있었고 서점은 다시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한국에서 산 이수지 작가의 『강이』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가끔 펼쳐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강이가 이웃집 개 같다. 과묵한 책 안에서 눈으로 내게 이야기하는 강이. 어느 도시를 가든 서점의 그림책 코너는 나의 최애 공간이 되었다. 얼마 전 만난 이사 와타나베라는 페루 작가의 『이동』은 책이라기보다는 화가의 작품 연작을 한 손에 쥐고 펼칠 수 있게 만든 물건 같았다. 책을 펼치자 이주하는 동물들의 검은 침묵이 1732년에 문을 열었다는 리스본 서점 한쪽을 채워버렸다. 어둠 속의 동물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설명도 없다. 동물들의 표정, 몸짓, 털의 결, 손가락 끝을 읽어야 했다. 서점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읽을 자신이 없어 책을 사 집으로 왔다. 나는 동물들이 입은 옷의 패턴을 보고 감탄하며 2분만에 책장을 덮기도 하고, 이들은 무엇을 피해 이동할까 혹은 무엇을 찾아 이동할까, 이들은 누굴까 겹겹의 생각을 하며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한다. 그림은 텍스트보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정답도 없다. 글자가 없어지면서 빈 공간이 생기고 작가는 그곳을 그림으로 채운다. 글이 없어서 독자는 자유롭다. 그리고 나는 그림책 표지를 열어 나를 둘러싼 외국어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