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식물들은 금세 자라 뿌리가 화분 밑 배수구로 무성하게 뻗어 나오고, 또 어떤 식물들은 런너(runner, 기는 줄기)가 화분 테두리를 넘어 밖으로 나가려고 아우성이다. 반면에 뭔가 컨디션이 맞지 않아 잎이 하나둘씩 시들며 점점 쇠약해지는 식물도 있다. 모두 분갈이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식물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분갈이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의 방 책상은 분갈이를 위한 작업대가 된 지 오래고 각종 토양 종류와 분갈이 도구, 비료, 시약이 담긴 병들이 선반을 채우고 있다.
반려동물이 커 갈수록 새로운 집과 액세서리가 필요하듯, 반려식물이 점점 더 자랄수록 새로운 화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키우는 반려식물이 많아질수록 하나하나 살펴보고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가끔씩 식물 잎들을 들추며 벌레가 없는지 확인도 하고 심지어 분을 통째로 빼서 뿌리 상태를 살펴보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시약이나 비료를 주고, 너무 늦지 않게 분갈이를 해 주곤 한다. 나와 함께하는 반려식물의 행복한 상태를 제대로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 내가 식물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옛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화분에 반려식물을 키우며 즐겼을까? 화분 식물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무려 4천 년 전 그리스 시대 미노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크노소스 궁전 벽화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화분에서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안이 반려식물 마니아의 원조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 전문서 『양화소록』에 보면 다양한 식물들을 화분에 재배하며 즐기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심지어 누워서 식물을 즐기는 와유(臥遊)라는 개념도 소개되어 있는데, 소위 ‘풀멍’, ‘꽃멍’이라고 하는 요즘 신조어의 개념에 ‘눕멍’을 가미한 재밌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식물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마음 수양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식물을 키우며 자기 수양을 하고 꽃과 나무를 훌륭한 벗으로 삼았다. 코로나19 같은 심각한 전염병과도 함께 살아가야 할 만큼 힘겨운 요즘, 옛사람들이 행했던 화분 가꾸기는 여전히 큰 의미가 있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공간에 점점 더 많은 식물들이 자리하여 말없이 자신들이 지구에 살아가는 방식을 속삭인다. 식물들을 바라보고 보살피는 시간은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분갈이를 하며 나를 다스리고 식물을 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