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를 쓰면서 느낀 ‘솔직’하지만 ‘재미’도 있는 집필 후기를 써 달라는 청을 받았다. 어명보다 무서운 편집자의 청을 빙자(?)한 요구. 글 쓰는 사람이 솔직하게 쓴대서 반드시 글이 재미있는 건 아니다. 솔직하다는 게 무엇일까? 작가로 살다 보면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으로 맨얼굴과 가면이 들러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런 난감한 요청에도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넙죽 수락했다. 최근 편집자들이 쓴 책이 많이 나온다. 1년에 네댓 권 이상의 책을 만들어 내는 이들. (그 배를 만드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반면에 작가는 1년은커녕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2-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바치기도 한다. 책이 나오기까지 편집자는 당근과 채찍으로 저자를 훈육하고 양육하지만 일단 초고가 완성되면 전세는 단번에 역전된다. 편집자는 첫 번째 독자인 셈이다. 원고가 좋으면 출간을 서두르지만 그렇지 못하면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처럼 대화가 헛돈다. ‘선생님의 글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그리다』도 그렇다. 편집자는 내게 ‘미스코리아를 배출하는 미용실 원장님의 심정이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순박했던 초고가 제법 세련되게 바뀌었다고 믿고 싶다. 원래는 『사기』에 나오는 검객 형가의 이야기를 길게 실었다. 고대 동양에서 제작된 그림이라 특색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음에도 결국 실패한 인물이라 여러모로 의미가 깊지 않을까 했다. 결과는? 책에는 형가의 이야기가 빠졌다. 반면에 각 장의 인트로 글은 초고에는 없었다. 단어를 바꾸고, 문장을 더하고, 문단을 수정하고… 편집자와 저자의 밀고 당기기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걸 털어놓은 듯해도 적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전체 흐름에 들어맞지 않아 일찌감치 빼야 했던 상념 하나를 여기에 적어 보려 한다. 책과 어긋나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누구나 비슷한 공상을 한 적이 있지 않을까? 어렸을 적 나는 동서문화사에서 출간한 ‘에이브(Abe)’ 전집을 즐겨 읽었다. 그중 맨 처음 읽었던 책이 추콥스키의 소설 『은빛 시절』이다.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공상에 빠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공립학교를 다니던 주인공은 어느 날, 학교에서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연달아 질타를 받더니 급기야 퇴학 처분을 받는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힘들게 일하며 자신을 보살피던 어머니에게 이 일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소설에서 장례식에 대한 공상은 당연히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넘어져서 엉엉 울다가 어른들이 오지 않는 걸 알아차리는 아이처럼, 주인공은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고 대안을 찾아야 했다. 역시 소년이었던 나는 ‘나의 장례식’이라는 당시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 시절에는 적확한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는 당시의 느낌을 더듬어 가며 ‘이상했다’ 대신 적확한 어떤 표현을 고민해야 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번 책은 ‘죽음’이라는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상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그 고통은 몇 배나 컸다. 하지만 어느 시절 예상치도 못하게 죽음에 얽힌 묵직한 무엇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 있다. 이 글이 솔직하고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어느 정도 허들은 넘은 게 아닐까? 부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