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33 종합 출판사 시공사에서 예술, 교양 분야 도서를 발간하는 시공아트의 뉴스레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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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좋아한다. 예정도, 계획도 없는 순간들을.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게 묘미다. 불투명한 것들의 조합은
세상에 없던 걸 만들기도 한다. 파리로 가던 길이었다. 언덕 끝에 다다르자
숨이 막힐 듯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오늘의 주인공. 언덕 덕분에 구름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솟은 것 같다.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구도를 잡았다.
눈으로 본 풍경 그대로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하늘색 올드 카가
내 옆을 쌩 지나치더니 그대로 언덕 끝을 향해 질주하는 게 아닌가.
놀랄 틈도 없이 온 신경을 거기 쏟아 냈다. 하늘과 도로의 비율을
고민하다 하늘 저편으로 날아오르는 쪽을 택했다.
아직까지는 그 선택이 옳은 듯하다."
『스트리트 포토 파이터』, 시공아트
본문 202-203쪽, 글 · 사진: Simps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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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할 때엔 오래된 혼돈으로 내려가야만 하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날이 추워지면 중세를 배경으로 한 책들에 파묻혀 지내곤 하는데, 최근에는 로런 그로프의 소설 『매트릭스(Matrix)』(펭귄 북스, 2022)를 정독하며 흥미롭게 탐구 중이다. 요즘 내가 주로 독서와 작업을 하는 장소는 도심의 어느 성당 뒷편으로 말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있어서 책에 등장하는 수녀원의 분위기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포털 같은 역할을 한다. 『매트릭스』에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고, 동일한 핵심 구조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미궁 혹은 미로이다.
미궁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문학의 모티프들 중 하나로서, 처음 접한 것은 그리스 신화에서였다. 신화에는 천재 예술가인 다이달로스가 크레타의 미노스 왕을 위해 건축한 미궁이 등장하는데, 미노스 왕은 그곳을 왕비인 파시파에와 황소 사이에서 태어난 괴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는 용도로 활용했다. 추후 이 괴물에게 인신공양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반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쥐어준 칼과 실타래로 미노타우로스를 해하고, 출구를 찾아 미궁을 빠져나온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미궁이라는 혼돈과 그 중심에 위치한 제어 불가능한 야성을 극복하는 지혜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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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 모자이크 부분(4세기경), 오스트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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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원의 도서관 서고에 설치된 미로는 수도사들에게 금기시된 무언가와 그들 사이에 비밀스럽게 공유되는 본능적인 비밀을 가두고 있다는 점에서 크레타섬의 미궁과 유사한 점이 있다. 주인공인 윌리엄 수사는 이곳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서고를 직접 돌아다니며 지도를 그린다. 그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이 지도는 결국 그가 미로를 풀어내도록 돕는 실타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아리아드네는 수도원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미신을 몰아내는 이성, 즉 로고스이다. 미로의 내부에는 방문자들의 감각을 속이기 위한 수많은 장치들이 구비되어 있는데, 윌리엄이 이들을 해독해 정교한 수수께끼들을 풀어내며 사람들 마음속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미로를 관통하는 과정이 재미와 감동을 준다.
반면 소설 『매트릭스』에선 수녀원의 원장 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직접 미궁을 건설하는 내용이 플롯의 정중앙에 등장한다. 수녀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의 용도로 미궁을 짓는다. 건설 과정에서 그들은 치마와 소매를 걷어올리고 돌을 나르고 나무를 자르며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봉인되어 있던 자신과 집단의 힘을 확인한다. 미궁이 완성된 후, 마리는 홀로 그 안을 탐험하다가 길을 잃고 다시 나가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를 침해하고 신의 권능인 창조를 모방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면서도 자신이 그것이 주는 성취감을 더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실타래는 능력과 힘에 대한 갈망이며 왕비를 향한 사랑인 에로스다.
텍스트(text)는 중세 영어에 어원을 두고 있고, 라틴어로는 티슈, 즉 섬유와 글쓰는 양식을 뜻하는 텍스투스(textus)에서 파생되었다. 직조하다는 텍세레(texere)와 같은 어근을 같는다. 나는 글을 읽고 쓰고 번역할 때, 자주 미궁을 헤매고 있다고 느낀다. 언어는 혼돈 그 자체인 미궁을 구성하고 있는 직조물이며, 내 손에 쥐어진 실타래는 문법일 것이다. 특히 번역은 이미 직조된 섬유의 씨실과 날실을 하나 하나 바꿔서 최대한 원본과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과정으로, 중간에 이가 빠지면 티가 난다. 이 반복되는 수도사 같은 생활에서 나를 방해하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저 놀고 싶은 본능이다. 나는 이들을 이고 지고 그 촘촘히 직조된 단어들 위에서 조심스레 한걸음씩 나아가고자 노력한다. 수천 번 모습을 드러내는 막다른 골목에서 좌절하고, 한 자리에서 맴돌기를 반복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실수과 정정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책이 나온다면 그제서야 미궁을 빠져나온 기분이 든다. 철학은 사색 자체에 목적을 둔다고 하지만, 번역 작업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힘은 분명 이 미로에 끝이 있다는 믿음이다.
최근 완성한 번역서는 대부분의 작업을 케임브리지에서 진행했고, 서울에서 마쳤다. 나는 영국에 있을 때 도서관에서 귀가하는 어스름한 저녁 종종 비트겐슈타인이 잠들어 있는 기숙사 뒷편의 공동 묘지를 바라보곤 했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밤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올빼미와 공작새가 울어대는 소리가 음산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깊고 검은 혼돈에 빠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글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어떤 힘이 담겨져 있다. 내가 그 혼돈의 세상을 다시 찾는 데에는 분명 에로스와 로고스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어쩌면 오히려 그 미궁이 편해진 것이다. 그곳의 암흑이 내 안으로 들어와 깨달음의 환영을 낳고, 오만을 다독이고, 바깥 세상이 주는 불안을 잠재운다. 미궁의 중심에서 세상은 뒤바뀌기 때문이다. 안은 밖이 되고, 입구는 출구가 된다. 이 모든 것이 홀로 감당하기 벅차면서도 행복할 때가 있다. 여기서 나를 밖으로 나가도록 이끄는 실타래는 아마도 또 다른 미궁, 또 다른 사색, 또 다른 책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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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써 주신 이정연 선생님은
영화 영상 비평가이며 미술 이론가로서 저술과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뉴욕 대학교(NYU)에서 현대 미술 이론과 박물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영상학 박사과정을 수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짝퉁 미술사』(이마고), 『사라진 그림들의 인터뷰』, 『그라피티와 거리미술』, 『얼굴은 예술이 된다』(시공아트) 등이 있다. 시공아트에서 출간 예정인 『Art in the Making』의 번역과 『뉴욕 미술관 산책』의 집필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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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일기 #1
포착된 찰나에 자신을 담아내기까지
교보 VORA 클래스(12. 15. 7PM)에서 만난
화제의 포토그래퍼 Simpson Kim
이른 아침부터 전해진 대설주의보. 참석자로 당첨되신 분들 모두 원활히 걸음하실 수 있을까? 약속된 저녁 7시, 감사하게도 앞선 염려가 무색할 만큼 강연장이 가득 채워졌다.
몇 년간 비대면 강연만으로는 아쉬움이 크셨던 작가님은 고대하던 현장에서 한 분 한 분과 진솔하고 즐겁게 소통해 가셨다. 마음이 이끄는 걸음을 따라 나선 10여 년의 작품 활동을 정리한 『스트리트 포토 파이터』을 또 다른 방식으로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다. 촬영 당시의 숨은 이야기에 함께 웃음 짓고 또 감탄하며, 인상적인 한 컷 한 컷이 어떤 순간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공유하게 되었다. 기약 없는 긴 기다림과 숱한 고투 속에 지켜 낸 행복과, 때로 일순간의 햇살 같은 우연까지 놓치지 않은 노력들이 오늘의 Simpson Kim을 만든 것이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순서에서는 한정된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사진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진지한 열의가 그대로 전해졌다. 진심을 담은 답변으로 호응한 저자와의 사인회와 기념 촬영을 끝으로 12월 15일의 보라 클래스는 막을 내렸다. 지켜본 모든 과정에서 뿌듯함을 발견하게 되었던 정말 꽉 채운 하루였다.
눈 쌓인 광화문에 걸음해 주신 모든 분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수고하신 교보문고 관계자와 마케팅팀, 잊을 수 없는 멋진 강의 펼쳐주신 작가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같은 장소에서 다음 화요일에 열릴 전원경 교수님의 보라 클래스도 기대해 주세요.
-에디터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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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일기 #2
편집자 윤슬의 첫 인사
안녕하세요, 시아레터 구독자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해 11월부터 시공아트와 함께하게 된 편집자 "윤슬"입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지나갔어요. 편집일을 하는 짬짬이 시공아트 배너도 만들고, 글도 매만지고, 블로그도 가꾸고 있습니다. 좋은 책들이 가득한 시공아트에서 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열심히 배우고 성장하여 멋진 책들 소개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모두 행복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디터 윤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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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시아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2022년 시공아트와 함께해 주신 모든 구독자님, 고맙습니다!
우리 2023년에 건강히 또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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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동구 상원1길 22 북스사업본부 예술교양팀 (시공사 출판사) sialetter@sigongsa.com
시아레터에 전하고 싶은 말, 추천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시아레터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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